언하대오

  • 달다
  • 어느것이 자네 별인가?
  • 어생일각(魚生一角)
  • 바른 스승을 찾아라
  • 이러한 때 어떻습니까?
  • 화두 두는 법

여여로 상사디여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치시고

황앵상수일지화(黃鶯上樹一枝花)요
백로하전천점설 (白鷺下田千點雪)이로다


부득이 해서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거기에다 송(頌)하나를 붙이되 주장자를 들어서 대중에게 보인 도리는, “노랑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떨기 꽃이요.” 법상을 친 도리는 “백로가 밭에 내리니 천 점의 눈이니라.” 내가 이렇게 일렀다.

그 다음에 또 주장자를 들었다가 법상을 치고 이 도리를 이르되, "사자는 사람을 무는데 한나라 개는 흙덩이를 쫓는다." 했으니 그만하면 알 것이지 거기에다 또 무엇을 첨부해서 말할 것인가.

그러나 알수록 그 허물이 많고, 우리 중생의 알음알이가 모르는 것보다 더 허물이 많아 법문을 듣고 알음알이를 내는 학자에게는 방(棒)을 내리는 것이다. 아무리 알아 보았자 분별식으로 아는 것은 번뇌 망상만 더하고 차라리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알음알이가 없느니라.

우리 중생들은 분별(分別) 망상(妄想) 때문에 생사고(生死苦)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아는 것이 모두 망상이고 업(業)인데 이런 소견으로 법문을 들어보았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한 방망이요, 아는 것은 두 방망이라 하는 것이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이 자리에서 이런 법문을 듣고 언하(言下)에 도인은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경계를 취한다. 또 사자는 짐승 중의 왕이니 흙덩이를 던지면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는다.

그러면 도인은 마음을 취한다고 하니 어떤 것이 마음인가. 마음을 쫓아 들어가도 마음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며, 모든 색상이 끊어진 자리인데 어떤 것을 마음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도인은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경계를 취한다고 하니 도인이나 사자도 색견상견(色見相見)에 떨어지거늘 하물며 경계를 취하고 흙덩이를 쫓는 것은 그 얼마나 어긋난 것인가.

그래서 우리 불법의 해탈도리(解脫道理)는 부처와 부처가 서로 보지 못하며, 천성(千聖)도 알지 못하였고,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그 생사 없는 근본당처(根本當處)에 들어가서는 무일물(無一物)이니 유일물(有一物)이니 하여도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일러야 하겠는가? 이 생사해탈법이 언하에 있는 것인데, 언하를 여의고는 참으로 얻기 어려우니 언하에 대오(大悟)해야 하느니라. 즉, 법문을 듣다가 깨닫는다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 스님과 용성 스님 두 선지식이 서로 법담을 하시게 되었다. 용성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이르시오." 하시니 만공 스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계셨다. 그러자 용성 스님은 만공 스님에게 "양구(良久)를 하시는 겁니까?" 하고 물으니 만공 스님의 대답이 "아니오." 라고 하셨다.

그 후 이 법거량(法擧揚)의 내용을 들은 나는 용성 스님을 뵙고 "두 큰스님께서는 서로 멱살을 쥐고 흙탕에 들어간 격입니다." 하니 용성 스님께서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스님께서 한번 물어주십시오." 하였더니 용성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일러라." 하셨다. 내가 대답하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라는 말씀입니까?" 하니 용성 스님은 "옳다, 옳다." 하시었다.

불법이란 것은 이렇게 한번 방망이를 업고 들어가서 뒤집고 살아가는 것이다.

근세 한국불교에서 선의 중흥조이신 경허 대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을 한번 말하여 보겠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하고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로다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에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로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삼천 세계가 나의 집인 줄 깨달았다. 유월의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허물이 있으면 한번 방을 쓰고 들어가는 법이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후, 일곱 걸음을 걸으신 뒤 사방을 돌아보시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시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셨는데 그 후 운문선사(雲門禪師)가 나와서 말하기를 "내가 당시에 만약 보았더라면 한 방망이로 타살하여 개에게 주어 씹혀서 천하를 태평케 했으리라."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운문끽구자(雲門喫狗子)' 라고 하는 선문중(禪門中)의 '척사현정(斥邪顯正)' 공안이다. 그런데 나도 경허 큰스님의 오도송에 대하여 일방(一棒)을 쓰고 한마디 하였다.

우리 선가(禪家)에는 참선해서 견성(見性)하는 법을 소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 있는데, 만약 중이 시주의 은혜만 지고 도를 닦아 해탈하지 못하면 필경 죽어서 소밖에 될 것이 없다는 말을 어떤 처사가 듣고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만 되어라." 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경허 큰스님은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였던 것이다.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문수보살은 말로써 이를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유마거사는 묵묵히 말이 없음으로써 이르니 유마거사야말로 불이법문을 가장 잘 설했다고 찬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도는 승속에 관계없는 것이다.

단 한마디 '소 콧구멍 없다' 는 언하에 대오하였던 것이다. 견성하여 생사해탈법을 얻어 삼천 세계가 그대로 나의 집인 줄 깨달았으니 무슨 일이 있으리오.

'유월의 연암산 아랫길에 야인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참으로 훌륭하고 거룩한 오도송이라고 여러 큰스님들이 모여서 찬탄하시기에 나는 경허 큰스님의 제자이신 만공 스님과 만공 스님의 제자 보월 스님이 계신 앞에서 직접 말하였다.

"무비공(無鼻孔)에는 없다(無)는 허물이 있고, 돈각시아가(頓覺是我家)에는 깨달았다는 각견(覺見)의 허물이 있으며,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에도 역시 허물이 있으니, 이런 것이 붙어서 생사묘법(生死妙法)을 못 보고 또 제구 백정식(白淨識)을 못 건너가게 딱 가로막고 있어서 학자가 그 곳에서 넘어지게 되는 것이니 학자를 바로 지시하여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보월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 참 공연히 말을 제멋대로 하네." 하셨다.

그때 만공 스님께서 "그러면 자네가 한번 일러보소." 하셨다. "예. 참, 저보고 일러 보라고 하시니 참말로 감사합니다. 천하에 없는 해탈 보배를 바로 주신들 그 위에 더 반갑겠습니까. 그러면 큰스님께서 한 번 청하여 주십시오." 하니 만공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그러면 경허 큰스님의 '무비공 도리' 나, '각견 도리' 나 '무사태평가 도리'를 어디 한 번 제쳐 버리고 일러 보소." 하시었다. 내가 말하기를 " '유월연암산하로' 까지는 경허 큰스님이 송하신대로 두고, 제가 외람되지만 큰스님 송의 끝 구절 '야인무사태평가 도리'만 이르겠습니다." 하고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 내가 농부가를 부르듯이 이렇게 일렀다. 그랬더니 만공 스님이 있다가 "아, 이 사람아 노래를 부르는가? 여여로 상사뒤여가 노래가 아닌가, 노래를 부르는 일이 무슨 일인가." 하시었다. 그래서 나는 "스님이 재청하시면 다시 한번 이르지요." 그러고는 보기 좋게 춤을 추면서 곡조를 부쳐서 다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 하니 "적자농손(嫡子弄孫)일세." 라고 만공 스님은 점검하셨다.

심월고원(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光呑萬像)이요
광경구망(光境俱忘)하니
부시하물(復是何物)고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으니
빛이 만상을 삼키도다.
빛과 경계를 모두 잊으니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이것이 경허 대선사의 열반송이다. 경허 대선사는 이렇게 송하시고 일원상(一圓相)을 그리신 후 임자년 4월 25일에 갑산에서 입적(入寂)하시었다.

대중들이여! 어떤 것이 일원상의 본래면목인고?

누구나 나에게 화두를 요구하면 조주(趙州) 스님의 화두가 많지만 그 중에서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이닛고.'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를 선택하여 주었다.

그러면 여기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법을 간단히 말하겠다. 오직 화두만 잡되 이치 길도 없고, 말 길도 없고, 마음 길도 없어야 하느니라. 화두를 참구해 감에 십년을 하다가 또는 일생을 하다가 언하에 대오가 있는 법이다. 이 생사고해에서 아무리 분별 망상을 하나 언하에 한번 깨달아 버리면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에서 생각을 일으키되,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고 참 성품이 항상 자재(自在) 하느니라.

천지상공진일월(天地尙空秦日月)이요 산하불견한군신(山河不見漢君臣)이니라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도인은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경계를 취한다는 것과, 또 사자는 사람을 무는데 개는 흙덩이를 쫓는다는 것은, 더하고 덜할 것 없이 다 허물인데, 천지에 오히려 진나라 일월이 공했고, 산하에 한나라 군신을 보지 못하였구나.

이것은 또 무슨 도리를 취한 게송(偈頌)인가? 내가 대중을 위하여 이 뜻을 보이노니, "九九는 번성(飜成) 八十一이니라. 즉, 구구는 아무리 뒤집어 일러도 팔십일이니라."

산승이 모든 허물을 이 주장자에 미루어 놓고 불법을 설하였지만, 이 해탈정법을 혼자만 듣고 알아 가지고 남을 위하여 전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차라리 무량영겁에 생사고를 받고 있을지언정 소승심을 발하지 말라 하신 말씀도 있으니 이 법문을 듣고 모두 신수봉행(信受奉行)하고 남을 위하여 꼭 전하여 주기 바란다.

달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이것이 바로 만공 큰스님의 오도송이다.

인생의 무상함은 찰나다. 일체세간법은 꿈 같고, 환(幻) 같고, 그림자 같다. 이 몸으로 다행히 정법을 만났으니 생사해탈하는 이 참선법을 닦지 않으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또 알면서 닦지 않으면 더욱 어리석은 것이다. 금일 생사해탈정법을 배우는 대중들은 조금도 알음알이를 내지 말지어다.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면 깨치기 쉬운 것이 곧 도(道)이다.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공인 본각(本覺)이 있다. 즉, 참선을 하여 얻는 방법이 있건만 모두 모르고 있는 것이다.

화두를 잡고 있으면 처음에는 사나운 소나 말처럼 마음대로 달아나고 망상 잡념이 더 생기고 또 해태심까지 생긴다. 그러나 퇴전을 하지 말고 계속하고 또 계속하여 용맹정진을 해가면 반드시 화두의 의심뭉치가 가슴 속에 꽉 차게 된다. 마치 늙은 쥐가 쌀궤를 파고 또 파면 반드시 그것을 뚫고 쌀을 먹게 되는 것과 같이 참선법도 또한 마찬가지다.

의심을 하고 또 의심을 하면 번뇌 망상의 파도가 아무리 거세지만 화두를 찾는 힘 앞에는 모두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대중들은 해태심을 내지 말고 대신심(大信心)·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으로 화두만 잡고 매(昧)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언하대오 하리라.

내가 23세 되던 해에 마곡사 아래 구암리에 계시는 혜봉 스님을 배방(拜訪)하고 묻기를
"조주무자의지(趙州無字意旨)는 천하 선지식이 반(半)도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무자의지(無字意旨)를 반만 일러 주십시오." 하니
혜봉 스님이 답하시되 "무(無)"
내가 또 묻되, "그것이 어찌 반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그러면 수좌가 한번 일러보소." 하시면서 "어떻게 일렀으면 반이 되겠는고?" 하셨다.
내가 답하되 "무(無)."

혜봉 스님께서 잠시 침묵하시더니 또 묻기를
"<거년(去年)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거년엔 송곳 세울 땅이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도 없다.> 라는 법문이 있는데 고인이 점검하기를 여래선(如來禪)밖에 안된다 하였으니 어떤 것이 조사선(祖師禪)인고?" 하시었다. 내가 답하기를 "마름뿔이 뾰족하나 저와 같지는 않습니다.(菱角尖尖不似他)" 하였다.

그때 혜봉 스님이 '아니다' 이 말 한마디만 해주셨으면 그 어른 밑에서 불을 때고 마당을 쓸며 시봉을 할지언정 세상 없어도 안 떠났을 것이다. 그때 "어떤 것이 조사선인고?" 물으셨을 때 "무(無)" 그렇게 일렀으면 파수공행(把手共行)하며 쾌히 인가를 해 주셨을텐데 이것 하나 그때 바로 못 이른 것이 참으로 원통하다.

내가 곧 죽게 되었으니 후래 학자를 위해서 이것을 바로 내놓아야 할 것이다. 선사의 도덕을 중히 여기지 않고 다만 나를 위해 설파해 주지 않은 것을 중히 여긴다는 고인의 말씀이 있지만 이것은 조사선을 일러 놓은 것이지 설파가 아니다.

'무' 라고 한 그놈을 바로 봤는가? '무' 라고 했으니 무슨 '무' 인고? 만약 봤으면 일러 보아라. 그 놈을 여의고 이르면 눈 먼 놈이고, 중생 눈을 멀게 하며, 학다리를 잘라 버리고 오리다리를 잇는 것이다. 학자들이여! 확철대오한 뒤에 살펴볼지니라.

내가 24세 되던 해에 부산 선암사에 계신 혜월 스님을 배방하였다. 혜월 스님이 나에게 묻기를,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공적을 이르게" 내가 답하기를, "볼래야 볼 수 없고 안 볼래야 안 볼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또 묻기를, "공적영지의 영지를 일러라" 내가 답하기를,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다시 묻기를 "공적영지의 등지(等持)를 일러라" 하셨다. 내가 답하기를, "해는 서산에 지고 달은 동녘에 뜹니다(日落西山月出東)" 하니 혜월 스님께서 "아따야! 우리 조선에 참 큰 도인났다. 누가 공적영지등지를 이를 사람이 있겠느냐." 하시고 대찬을 하셨다.

같은 해에 대각사에 계신 용성 스님을 배방하였다.
용성 스님이 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제일구냐? (如何是第一句)" 나는 높은 음성으로 "예?" 하니
용성 스님께서 또 묻기를, "여하시 제일구여?" 나는 박장대소 하였더니 용성 스님께서 "아니다"라고 하셨다.
내가 여쭙기를 "그러면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하였더니 용성 스님이 부르시기를 "영신아!"
"예."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용성 스님은 즉시 "제일구니라" 하셨다. 나는 또 박장대소 하였다.
용성 스님께서 "자네가 전신(轉身)을 못했네" 하시기에,
나는 "그러면 전신구를 물어주십시오" 했더니 "어떤 것이 전신구인가?"
내가 답하되, "저녁놀은 따오기와 더불어 날으고 가을 물은 하늘과 함께 일색입니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하고 물러 나왔다.

수일 후에 용성 스님께서 대중에게 공포하시기를, "허! 내가 영신이에게 속았구나!" 하셨다. 이 말을 전하여 들은 만공 스님은 "속은 줄을 아니 과연 용성 스님일세" 라고 하셨다.

내가 24세 되던 어느 날, 금강산 지장암에 계신 한암 스님을 배방하였다. 한암 스님이 나에게 묻기를 "육조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자네는 어떻게 하였으면 인가를 받겠는고?" 하시었다. 나는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 나왔다.

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 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 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 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 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 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에 대오할지어다.

어느것이 자네 별인가?


작야월만루(昨夜月滿樓)하더니
창외노화추(窓外蘆花秋)로다
불조상신명(佛祖喪身命)한데
유수과교래(流水過橋來)로구나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나, 전강의 오도송이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묘법이요, 온 법계가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일체가 유심조(唯心造)이다. 그러나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마음도 없다.

내가 25세 때 덕숭산 금선대에 계신 만공 스님을 처음 찾아가서 예배하니 나에게 묻기를 "심마물이 임마래오(甚物 恁來)?" 하시었다.
내가 다시 예배하니
또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어?"하시었다.
이번에는 내가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니
만공 스님은 그만 얼굴을 찌푸리시면서 "허! 저렇게 주제 넘는 사람이 견성했다 해. 네 습기(習氣)냐, 체면없이 무슨 짓이냐?" 이러시고는 그 다음부터는 나를 보시기만 하면 비웃으며 "저 사람, 저런 사람이 견성을 했다 하니 말세 불법이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번번이 조롱을 하시었다.

나는 차츰 불안해지다가 분심이 났다. 선지식이 저러실 때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핏기가 하나도 없어 앉으면 잠이 와서 앉지도 못할 정도로 바짝 말랐다. 그래서 운동대를 붙잡고 서서 '에라! 한바탕 해봐야겠다. 그까짓 놈의 몸은 하다가 죽으면 그뿐이지.'하고 나는 만공 큰스님의 말씀을 믿고 그 회상에서 하안거 중 판치생모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다가 반 철이 지날 무렵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 의지(馬祖圓相公案 意旨)'가 확 드러났다.

그 길로 조실 방에 들어가 보월 스님 앞에 원상을 그려 놓고 묻기를 "마조원상 법문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入也打 不入也打)>고 하였으니 조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이르시겠습니까?" 하니 보월 스님은 곧 원상을 뭉개셨다.
나는 보월 스님께 말하되 "납승을 갈등 구덩이(葛藤과臼) 속에 죽이신 것입니다. 마조방하(馬祖棒下)에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월 스님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닫고 만공 스님 처소에 와서 다시 묻되,
"마조원상 법문을 보월 스님께 물었더니 원상을 뭉개었습니다. 이렇게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만공 스님은 도로 나에게 묻되 "자네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하시었다.
내가 답하되, "큰스님께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더니
만공 스님이 주장자를 초안이에게 주시면서 "자네가 묻게" 하시니 초안 스님이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고 "입야타 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 해서, 내가 초안이를 보고 여지없이 일렀다. 그러나 학자를 위해서 설파하지 않는다. 만공 스님께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점검하시되,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가 있겠느냐(誰知更有夜行人)" 하셨다.

그런 다음, 만공 스님과 한암 스님과의 서신문답과 기타 중요 공안에 대한 탁마(琢磨)를 낱낱이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만공 스님께서 물으시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했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시니 내가 곧 엎드려서 허부적 허부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하니
만공 스님께서 "옳다. 옳다!(善哉善哉)" 인가하시고 곧 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지어 주시되,

불조미증전(佛祖未曾傳)이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이라
차일추색모(此日秋色暮)한데
원소재후봉(猿嘯在後峰)이로다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제방 선덕(諸方禪德)들은 한번 착안해 볼지어다.

우리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여러 유명한 선인들을 차례로 찾아서 도를 물었으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으로 극과(極果)를 삼으므로 구경(究竟)의 생사해탈법이 아님을 알고 선인의 처소를 떠나셨다. 이것이 바로 출가의 진면목이다.

참선법을 닦는 대중들이여! 저 비상비비상처정 따위를 얻고서 부처님의 정법을 증득하였다고 하지 말라. 더욱이 입을 벌려서 학자를 속인다면 그 죄는 더욱 크리라. 자기나 눈이 멀지언정 어찌 남까지 눈 멀게 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선병(禪病)에 걸린 자는 모름지기 눈 밝은 선지식을 찾지 않는다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되리라.

지금부터 삼백여년 전 월봉(月峰) 스님이 계셨는데 법문을 잘 하기로 그 당시에 제일 유명하였다. 그때 나라에 큰 재(齋)가 있어 월봉 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법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나라의 중신과 청신사 청신녀 등 사부대중이 많이 모였다. 그 중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노승도 끼어 있었다. 이 노승이 바로 환성지안 선사(喚醒志安 禪師)인 것이다.

그런데 월봉 스님은 법문을 하실 시간이 되었는데도 웬일인지 떨면서 기력을 잃고 법문을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월봉 스님을 억지로 법상에 오르게 하고 법문을 청하였다.

그때 월봉 스님은 『원각경』「보안장」을 설하시는 중에 '무변허공 각소현발(無邊虛空 覺所顯發)'이라는 구절을 법문하게 되었는데 월봉 스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무변허공에서 각이 나타난 바이니라" 이렇게 엉뚱하게 법문을 할 때 앉아서 듣고 있던 노승이 벽력같은 '할' 을 하니 월봉 스님은 법상에서 뚝 떨어졌다. 그것은 원각대지(圓覺大智)에서 나온 노승의 일할(一喝)에 그만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생사해탈정법은 법문을 잘하고 명성이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고 증득하는 데 있는 것이니 만약 그때 노승의 할이 없었던들 대중들은 <무변허공이 각의 나타난 바이다>를 <무변허공에서 각이 나타났다>고 그릇 믿을 뻔하였으니, 부처님의 정법이 사견종자(邪見種子)로 말미암아 얼마나 위태하였겠는가! 그러나 노승의 '할'로 부처님의 정법을 바로 잡았으니 이것이 바로 불법정화인 것이다.

소요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비하여 성동(聖童)이라고 고을 사람들한테 칭송을 받았다. 13세에 출가하여 부휴대사 밑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통달하고 수백 명의 학인 가운데 운곡(雲谷)·송월(松月) 스님과 더불어 법문삼걸(法門三傑)이라고 칭호를 받았던 17세의 소년 강사 소요 스님이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부처님의 경전을 아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마칠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 묘향산에 계신 서산대사를 찾아가서 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니, 서산대사는 보자마자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그날부터 시봉을 시키면서 능엄경 한 토씩을 매일 가르쳐 주셨다. 이미 경전을 통달한 강사인지라 능엄경을 모를 리 없지만 서산대사의 가르침이라 매일 배우다보니 삼 년이 다 지나갔다.

소요 스님이 생각하여 보니 한심하였다. 대선사요, 대도인이라 하여 찾아왔는데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이렇게 다 알고 있는 능엄경만을 가르쳐 주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참고 계속 배워 가는데 소요 스님이 잠깐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면 서산대사는 웬일인지 때묻은 작은 책을 보시다가는 곧 안주머니에 넣곤 하는데 이렇게 여러 번 계속되고 보니 소요 스님은 그 작은 책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많았다.

하루는 서산대사가 잠자는 틈을 타서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니 서산대사는 깜짝 놀라 깨어나서 그 책을 더욱 소중히 감추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관심이 많아지고 또 무슨 책인지 점점 의심이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단속이 심하고 또 그냥 그대로 아무런 법도 얻지 못하였으니, 더욱 화가 나서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소요 스님은 서산대사에게 하직을 고하니 그때야 비로소 서산대사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던 때와 콧물이 묻은 그 작은 책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가려고 하거든 이 책이나 가지고 가게." 하셨다. 서산대사가 주신 책을 펴보니 게송이 있는데,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하여
초진수중구(초盡水中구)로다
가소기우자(可笑騎牛者)여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로구나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물 가운데 거품을 태워 다할지니라.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이 게송을 가지고 호남으로 내려가 20년간을 참구하였으나 깨닫지를 못하고 나이 40에 이르러 다시 묘향산에 돌아가서 서산대사를 뵈오니 감개가 무량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0년간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 스승이 아니었던가.

서산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부가 어떻게 되었느냐?"
"떠날 때 주신 게송의 의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서산대사께서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하시는 바람에 소요 스님은 언하에 확철대오하였다.

어생일각(魚生一角)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에
응연일상원(凝然一相圓)이라
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거니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가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손가.




육조 스님의 적손이신 마조 스님은 남악회상에서 좌선만 하면서 좌복을 일곱 개나 뚫었다. 좌에 집착되어 마치 죽은 사람 같고 또한 목석으로 만든 등상(等像)같았다. 그때 회양 선사(懷讓禪師)께서는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을 보시고 묻기를,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니 마조 스님이 답하기를 "좌선합니다." 또 회양 선사께서 묻기를,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니 마조 스님의 답이 "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 라고 하였다. 회양 선사께서는 암자 앞의 바위 위에서 벽돌을 갈고 있었다. 벽돌 가는 소리를 듣다 못한 마조 스님은 회양 선사에게 그 까닭을 묻되, "스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 하렵니까?" 하니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라고 대답하였다. 마조 스님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벽돌을 갈아서는 도저히 거울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또 묻기를,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회양 선사는 "벽돌을 갈아 거울이 안되면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 줄 아는가?" 하시니 마조 스님이 묻기를,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하는 언하에 마조 스님은 확철대오하였다.

이것이 바로 '언하대오(言下大悟)'인 것이다. 회양 선사의 일구(一句)는 그대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 활구(活句)인 것이다. 참다운 선을 하려면 일체 선악 경계에 분별이 없고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아니해야 하며 반드시 간화선(看話禪)을 하여야 한다.

화두를 참구 하는데는 들어서 알 수 없고 생각하여 알 수 없다. 그러니 알 수 없는 화두를 용맹스럽게 꼭 잡고 의심을 매하지 말아야 필경에는 그 의심이 잡혀 들어와 뚜렷하게 나타나며 그 의심 전체가 한 덩어리 되어 내외가 없고 동서가 없으며, 또한 백만인 중에 있더라도 한 사람도 있는 줄을 모른다. 이렇게 의단이 차면 언하에 대오하여 생사 없는 해탈락을 얻게 된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모름지기 최상승법을 깨달은 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길을 지시 받도록 할 것이다. 만일 스승을 잘못 만나면 외도소견만 듣고 그것을 말하기까지 하니 외도가 번성하는 것이다. 외도지견은 팔만 사천 가지나 되니 얼마나 잘 번성하겠는가? 그러니 옳은 스승을 찾아서 증득한 바를 똑바로 점검을 받아야 하느니라.

대중들이여! 이 삼계화택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인데 달마대사가 부처님의 정법을 동토에 전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중생견에 빠져서 사후에는 삼악도밖에 갈 길이 없다. 그러니 생사해탈의 참선법을 배우는 대중들은 이 몸을 잃은 후에는 도저히 정법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니 용맹정진을 하여 육신을 가진 이 기회에 기어코 우리의 본래면목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십년단좌옹심성(十年端坐擁心城)하니
관득심림조불경(慣得深林鳥不驚)이라
작야송담풍우악(昨夜松潭風雨惡)터니
어생일각학삼성(魚生一角鶴三聲)이로다

십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의 성을 지키니
깊은 숲의 새가 놀라지 않게 길들었구나.
어젯밤 송담에 풍우가 사납더니
고기는 한 뿔이 남이요 학은 세 소리더라.

이것이 서산 스님의 게송이다. 의심이 많고 놀라기 잘 하는 새가 이제는 사람이 와도 놀라지 않는다고 하니 그 얼마나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경계인가.

분별·망상·산란심·무기심이 개시묘법(皆是妙法)이요, 그대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요, 해탈대각(解脫大覺)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 속에서 옷을 입고 밥을 먹지만 분별이 없고 산하대지(山河大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온갖 것이 그대로 해탈인 것이다.

바로 '어생일각(魚生一角)'이 그대로 각(覺)인 것이다. 이 도리는 속일 수 없고 '어생일각' 이란 말로는 아무리 하여도 안된다. 인간 시비, 애착, 생로병사가 다 끊어진 곳이니 분별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고기가 뿔이 하나 난 도리' 란 무엇인가? 이 도리는 언하에 시간도 공간도 없는 본마음을 바로 깨닫고, 생멸이 없는 본성품을 바로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도리를 나 전강이 이르되, "어생일각이 그대로 학삼성(鶴三聲)이니라."

대중들이여! 언하에 대오할지어다.

금일 내가 참선법을 닦는 정법학자에게 권하노니, 평시에 구두선(口頭禪)만 익혀서 도를 통달한 것처럼 말하나 경계를 당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홀연 죽음이 닥치면 무엇으로 생사를 대적하겠는가. 다만 남을 속여 왔으나 이 때를 당하여 어찌 자기마저 속일 수 있으랴. 몸이 잠을 자는데 또 다시 몸이 생겨서 별별 일을 다하면서 분별·망상·싸움을 하였던 것인데 꿈을 깬 후 잠잘 때 생겼던 몸은 어디에 있는가.

평상시에 맹렬히 정신을 차려 화두만 지켜 가면 날이 가고 해가 가서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불조대기(佛祖大機)를 깨달으면 천하선지식의 혀끝에 속지 않고 스스로 큰소리를 치리라.

선에 어찌 관문이 있으며 도에 내외가 있고 출입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 미오(迷悟)가 있으므로 이에 선지식인 관문지기가 부득불 때에 따라 관문을 열고 닫으며 열쇠를 잘 단속하며 그것을 엄하게 다스려서 혹 말과 복색을 달리하여 법도를 어기고 넘어가려는 자가 있으면 그 간계를 못 부리게 하니 관문을 통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에 자기를 밝게 알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선지식을 참예하여 생사근본을 마칠지어다. 공부하다가 겨우 심식(心識)이 좀 맑아져 약간의 경계가 현전(現前)하면 문득 게송을 읊으며 스스로 큰일 다 마친 사람이라 자처하고 혓뿌리나 즐겨 놀리다가 일생을 그르치고 마니 혓뿌리의 기운이 다하면 장차 무엇을 가져 생사를 당적하겠는가?

우리 정법학자들은 응당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거든 공부는 모름지기 참되어야 하고 깨침도 실다워야 하느니라. 오직 화두만 단단히 잡아 의심이 순일해지면 지각심(知覺心)을 내지 말라.

동정(動靜)이 일여(一如)하고 오매(寤寐)가 성성(惺惺)하면 홀연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하여 자기면목을 보리라. 이때에 널리 선지식을 참예하여 제조사의 중관(重關)을 통과하여야 하느니라.

금일 대중들에게 분명히 이르노니 백천만겁을 몸으로써 보시할지라도 소소영영한 주인공인 본각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하리라.

구년소실자허엄(九年小室自虛淹)하니
쟁사당두일구전(爭似當頭一句傳)이리오
판치생모유가사(板齒生毛猶可事)인데
석인답파사가선(石人踏破謝家船)이니라
구 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이것이 '판치생모'에 대한 고인의 송구(頌句)인데 '조사서래의'에 이 이상 더 가까운 게송은 없다. 금일 산승은 모든 허물을 '판치생모'에 붙이노니 대중들은 오직 '판치생모'만 붙잡고 용맹을 다하여 의심할지어다.

바른 스승을 찾아라



인성견오(因星見悟)라
오파비성(悟罷非星)이로다
불축어물(不逐於物)이요
불시무정(不是無情)이니라

별을 인해서 깨달음을 얻음이라
깨달아 마침에 별이 아니로다.
물건을 쫓지 아니함이요
이 무정이 아니니라.




지금 내가 이렇게 주장자를 들어 보였는데 대중은 주장자를 들기 이전 산승의 마음을 취하였다면 도인일 것이요, 만약 이 주장자를 보고만 있었다면 경계를 취하는 범부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 주장자 든 도리를 똑바로 보겠는가?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다.)

삼년 전 내가 범어사에 조실로 있을 때였다. 그때 일본 고베(神戶市 長田區 蓮官通六丁目三)에 있는 평화사 주지 성지신(成智信) 스님으로부터 상량기념으로 범어사에 불법대의를 물어왔다. 내가 답하여 보냈는데 이 법어가 고베의 평화사 법당에 족자로 걸려 있다고 한다. 참선 대중들에게 참고가 될까하여 한번 소개한다.

기평화사상량법어(寄平和寺上樑法語)
황화취죽선명묘법(黃花翠竹宣明妙法)하고
풍가월저현로진심(風柯月渚顯露眞心)이로다
앵음연어상담실상(鶯吟燕語常談實相)하고
두두비로물물화장(頭頭毘盧物物華藏)이로다
돌 회마(會魔)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하고
의수침면일이사(倚樹沈眠日已斜)로다

노랑꽃 푸른 대도 묘법을 밝히고
바람가지 물 달도 진심을 나타냄이로다.
꾀꼬리와 제비도 항상 실상을 말하고
낱낱이 법신이요 물물이 화장세계로다.
애닯다() 알겠는가?
머리를 돌이켜 산을 바라보며 흐르는 안개에 취하고
나무를 의지하여 졸고 나니 날은 이미 저물었도다.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법인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등등상속(燈燈相續)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만일 부처님의 정법을 조금이라도 잘못 전한다면 후세에 끼치는 허물이 많을 것이다. 깨닫지 못한 분상에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염화시중(拈花示衆)과 가섭미소(迦葉微笑)도 다 망설이다.

대중들이여! 위음왕불(威音王佛) 이후에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친 자는 모두 천연외도(天然外道)라 했으니, 법을 받은 명안종사(明眼宗師)에게 인가도 받지 않고 자기가 제일이라 하며 묘한 언구문자선(言句文字禪)을 활구(活句)라 하고 학자들을 속이고 있다면 이러한 외도들은 부처님도 구하지 못하리라. 금일 최상승 활구참선법을 닦는 대중들은 명심할지어다.

그러면 어떤 것이 활구참선법인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나니 오직 화두만 잡드리 하되 이치길도 없고, 말길도 없고, 마음길도 없나니, 이렇게 용맹정진 해나가다가 직하에 대오하는 것이다. 즉 한번 듣고 언하에 문득 깨달아야 곧 너의 본성을 보느니라. "일러라. 너의 본래면목을 일러라. 왜 너의 본래면목을 모르는가. 어서 일러라." 이렇게 다그치고 입만 열면 "어느 곳을 향하여 입을 여는가?" 삼십 방을 막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 주장자를 척 빼앗아 들고, "이 방을 한번 이르시오." "오냐, 그 방을 맞고 나갈 테니 너도 또 일러라. " 법이란 이런 것이니 여기서 똑바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격외장부(格外丈夫)인데 무슨 걸림이 있겠는가? 내가 나를 깨닫는 누진통(漏盡通)은 본각을 매하는 법이 없느니라. 오직 내가 나를 자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인 것이다. 이렇게 대평등 대원융(大平等 大圓融)·이사무애 사사무애(理事無碍 事事無碍)의 원각대지를 증득하고 이 삼계화택에서 색상경계에 집착하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여야 하느니라.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요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라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하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니라

마음은 일만 경계를 따라 구르고
구르는 곳마다 실로 능히 그윽하다.
흐름을 따라 성품을 인득하면
기쁨도 없고 또한 근심도 없느니라.

이 게송은 이십이조 마나라 존자가 이십삼조 학륵나 존자에게 설하여 오백 마리의 학을 제도케 하신 게송이다.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 법신이요 화장찰해(華藏刹海)다. 깨친 분상에는 무슨 걸림이 있으리오, 오직 인연 있는 중생을 위하여 생사해탈의 정법을 전할뿐이로다.

이러한 때 어떻습니까?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이요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하고
묘오는 반드시 마음길이 끊어져야 하느니라.




조사관이란 필경 뚫어야만 하는 것이다. 깨달아 놓고 보면, 없다면 없는 그놈이 그대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대로 없어지고 말면 될 것인가. 없는 것에 갖추었으면 있는 것에도 그대로 갖추어 버리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자니 이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다.

만공 스님 당시 각 회상에서 논란된 바 있는 '소당파(燒堂婆)'라고 하는 공안이 있는데, 어떤 암주가 공부를 하는데 시주 노파 한 분이 그 스님을 20년간 양식을 정성껏 대어드렸다. 20년이 다된 어느 날, 그 노파는 암주 스님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시험해 보려고 자기의 예쁜 딸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네가 가서 그 스님을 꼭 껴안고, <스님! 이러한 때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아라." 하였다.

딸은 어머니가 시킨대로 하였더니 그 암주가 답하기를, "고목이 찬 바위에 의지하니 삼동에 따뜻한 기운이 없다.(枯木倚寒岩 三冬無暖氣)" 라고 하였다. 딸은 그대로 어머니께 전했다. 노파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암주의 패궐(敗闕)을 알아차리고 토굴로 가서 "내가 저런 속한이한테 20년간 양식을 대었구나!" 하고는 암주를 쫓아내고 암자를 태워버렸다.

어째서 그 노파는 그렇게 청정하게 지내온 암주를 속한이라고 했을까? 암주는 어째서 속한이를 면치 못하고 쫓겨나야만 했겠는가, 이 무슨 연고인가? 이것이 공안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그 당시 큰스님들께서 모두 한마디씩 하셨지만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고 몇 개만 적어보면, "원앙이 녹수(綠水)를 만났다." "직접 경계를 쓰겠다." "배필이 되어 살겠다." "할을 하겠다." "방을 쓰겠다." 등의 답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공안에는 '할'도 '방'도 소용없는 것이다. '방' 내릴 때 벌써 속인이 되어버린 것이고, ‘할(喝)’할 때 계행은 파한 것이다. 위에 적은 어떤 답도 속한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대승계는 부처님께서도 범하지 않고서는 설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 공안이 대승계를 판단하는 공안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답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며 찾다가는 벌써 파계승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 함부로 여기에 대해서 입을 열 수가 있을까? 이러한 공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서야 어찌 중생에게 대승계를 함부로 설하겠는가?

큰스님네께서 이르신 답이 많이 있었지만 나로서는 "아닙니다."라고만 하여 왔다. 여러 번 답을 이르라는 요청도 받았지만 답할 것이 따로 있지, 이와 같은 공안에 함부로 답을 할 것인가. 미래 학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늘날까지도 끝내 답을 이르지 않았다.

금봉 스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 일러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일러 드리지 않았다. 지금은 금봉 스님마저 돌아가셨으니 누구에게 일러 볼 것인가, 죽어 황천에 가서 염라대왕에게나 일러볼까?

공부하는 학자들이여! 확연(廓然)한 뒤에 한 번 찾아오면 그때는 산승이 더불어 탁마하리라.

만공 스님 회상에 있다가 혜월 스님 회상으로 간 정운암(鄭雲庵) 스님으로부터 <삼세심을 다 얻을 수가 없는데 어느 마음에다 점치겠습니까? (三世心 都不可得 點何心)>라는 공안을 만공 스님 회상으로 물어왔던 것이다.

이 공안은 금강경 대강사로 큰소리치던 주금강(덕산스님)이 <경에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닦아서 성불한다고 하였는데 남방에서 '바로 사람 마음을 가리켜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하게 한다' 하니, 이런 외도놈들을 혼내주리라.>하고 남방으로 가다가 마침 시장기가 들어 점심을 먹으러 어떤 주막에 들어갔다.

주인 노파에게 점심을 부탁하니 노파가 주금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스님, 짊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주금강은 대답하기를 "금강경소초(金剛經疏抄)입니다." 하니,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점심을 달라 하시니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치실려고 합니까? 이것을 바로 일러야 점심을 드리겠습니다." 하니 꽉 막혀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점심도 못 얻어먹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노파의 지시로 용담 스님을 친견하고 방장에 밤늦도록 있다가 나오는데 밖이 깜깜하였다. 용담 스님이 촛불을 켜서 주금강에게 주자 주금강이 받으려고 할 때 훅 꺼버렸다. 순간 주금강은 활연대오 하였다.

그런데 이 공안에 대해서 만공 큰스님께서 답을 하시되, "과거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 점심을 먹어 마쳤느니라." 하시고는 엽서에 써서 보낼려고 하셨다.

그때 보월 스님께서 그 답을 보시고는 "큰스님 죄송합니다만……" 하며 성냥불로 태워버리고 그냥 나가버리셨다.

만공 스님께서는 그 자리에 정좌하신 채 꼼짝도 하시지 않고 일주일 간 용맹정진 하셨다. 칠일만에 큰 소리로 "보월아! 내가 자네한테 십 년 양식을 받았네." 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두 스님간에 밀계(密契)가 있은 후 보월 스님께서 이 답을 쓰시되, <호서를 등지고 영남으로 향하는 것은 심중에 남은 의심을 끊지 못하더니 여금에도 남은 의심을 끊지 못하였구나. 본 뒤에 소각하고 다시 남은 의심을 끊을 지어다. (背湖西向嶺南 心中不絶餘疑 如今不絶餘疑 見後燒却 更絶餘疑)> 이렇게 쓰셨는데 만공 스님께서 이 답을 보시고는 점두하시었다.

화두 두는 법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니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고

진로를 멀리 벗어나는 것이 예사 일이 아니니
승두를 꽉 잡고 한바탕 지을지어다.
한 차례 추위가 뼈 속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으리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묻되,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시되 "무(無)" 하셨으니, 이것이 '무자(無字)' 화두의 시초인 것이다.

종문중(宗門中)에서 이 '무자'를 제일 많이 칭찬을 해놓았으니 '무자' 화두에 대해서 말씀해보면,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 스님만은 왜 "무(無)" 라고 하셨겠는가?

이 '무자'에 대해서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없다, 허무(虛無)다, 이와 같이 이리저리 두 갈래로 분별하지 말고 능소(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홑으로 "어째서 '무(無)' 라고 했는고?" 하고만 생각해라.

여기에는 공(空)도 또한 거둘 수 없으며 유상(有相)·무상(無相)을 붙일 것도 없다. 필경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이 남으니 이것만 추켜들어라. "조주 스님은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만약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도리를 입껍데기로만 따져서 알았다고 하면 타일(他日)에 염라대왕의 철방을 맞을 것이다. 한번 조주 스님의 "무(無)" 라고 하신 뜻을 바로 보아야 생사해탈을 하는 법이다.

삼세제불의 골수요, 역대조사의 안목이다. "무(無)" 라고 말할 때 이미 그 의지가 확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특한 사람이면 당장 언하에 대오할 것이다.

이 '무자' 화두에 대해서 별별 해석이 다 나와 있다. 혹자는 일체 명근을 끊어버리는 칼이다, 또는 일체를 열어주는 자물쇠통이다,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빗자루다, 나귀를 매어두는 말뚝이다 등등의 한량없는 말들이 나와 있다.

그렇다. 나는 여기에 삼십 방을 주리라.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 지니라.

또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 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 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화두를 지어감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살이 전체가 망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화두가 잘 된다, 잘 안된다, 망상이 생긴다, 마음이 산란하다 등의 생각이 있으면 화두의 순일지묘(純一之妙)가 없게 되는 것이니, 일어나는 망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상관도 말며 두려워도 말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리고는 그저 알수 없는 의심 하나만 간절히 간절히 일으킬 것이며, 없어지거든 또 일으키고 부지런히 거각하여 끊어지지 않게만 자꾸 이어주어라. 이렇게 오래오래 물러나지만 않고 해나간다면 견성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는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만약 능히 신심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누가 견성성불을 못하리오(若能信心不退 誰不見性成佛)." 라고 하셨느니라.

또한 공부를 지어감에 속효심(速效心)을 내기가 쉬우나 이는 절대 금물(禁物)이다. 이것으로 인해 마음이 급해지고 생각이 쉬어지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고 보면 화두는 점점 멀어지고 자리가 잡혀지지 않게 된다.

또 공부 지음에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망념은 할 수 없거니와 '크게 깨달아야겠다' 라는 망념을 고의로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좌선함에 눈을 감고 하는 수가 많은데 눈을 감고 할진댄 혼침(昏沈)과 무기(無記)에 떨어지기가 일쑤며, 또한 흑산하귀굴(黑山下鬼窟)에 떨어진다' 고 고인이 밝게 말씀하셨으니, 두 눈을 평상으로 뜨고 허리는 쭉 펴고 맹렬하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 깨끗 깨끗이 자꾸 일으켜 매하지 않게 할 따름이다.

흔히들 화두를 머리에 두고 참구하기가 쉽다. 여기에 속효심이 가해지게 되면 상기(上氣)가 일어나게 된다. 모든 열기가 전부 머리로 치밀게 되어 머리 아픈 병이 생기게 된다. 이 상기병이 생기면 공부하기가 지극히 힘이 든다.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은 걷잡을 수 없이 쇠약해진다.

내가 소시에 이 상기병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받아 왔으나 결국은 자치지방(自治之方)으로 완치시켰다. 그 자치지방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호흡법이다. 이 호흡법은 참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간곡히 말을 하는 바이다.

정좌(正坐)하여 숨을 천천히 내어 쉬되, 단전 부위를 허리 쪽으로 살며시 당기면서 천천히 내쉰다. 그 다음 들어오는 숨은 팔부쯤 들어 마신다. 그때 자기 신체기량(身體氣量)에 따라 잠깐 멈추되 고통스럽지 않을 만큼 하면 족하다. 이때 화두는 단전(배꼽 밑 일촌 삼푼)에 두고 의심을 잘 관(觀)해야 한다.

그리고 이 호흡법은 숨을 내쉴 때 묘가 있는 것이니 코에 부드러운 털을 대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쉬되 이때도 역시 화두를 잘 관해야 한다. 들어가고 나오는 숨에는 상관말고 오직 단전에 둔 의심만을 묘하게 관해야 한다.

처음에는 잘 되질 않으나 언제든지 생각이 나거든 서너 번씩 하다가 차츰 길들여 가면 머리가 청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눈이 깨끗해짐을 느낄 것이다. 나중에 화두가 순일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이 자연히 잘 되는 것이다.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한 웅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하여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걸어 두노라.

불소(不少)한 허물을 옥난간에 걸어 둡니다.